1910년대 부산의 우시장 모습. 일제의 적극적인 소 사육 정책으로 1930년대 소 사육 두수가 크게 늘었다.(출처: 한국저작권위원회)
육류 소비의 중심이 된 요리점과 음식점
일제 강점기 육류 소비는 외식문화의 번성과 맥을 같이 한다. 1900년대 이전까지 주막은 술과 밥을 파는 정도에 그쳤고, 이용하는 계층도 보부상이나 상민 정도로 한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근대 상업의 발달로 시장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나고, 외래문화의 유입과 신분 제도의 철폐로 양반과 상민의 구분이 모호해지게 되면서 한반도에서 외식문화가 번성하게 됐다.
당시 육류 소비의 중심지는 종로 일대에 있던 요리점과 음식점들이다. 대표적인 곳으로 명월관과 식도원이 있었으며, 이들은 기생들의 춤과 노래뿐만 아니라 궁중에서 나온 숙수들을 고용해 궁중 음식을 재현함으로써 인기를 끌었다. 이들 요리점의 대표 음식은 양념한 한우와 한우 완자를 가득 넣은 신선로로, 외국인들의 입맛에도 잘 맞아서 ‘조선 음식은 신선로에서 시작해야 한다’라고 할 정도로 유명했다.
종로의 뒷골목인 피맛골에 자리한 주막에서는 조선시대부터 간편하게 먹을 수 있는 국밥이나 술국 등을 주로 판매했다. 일제 강점기에도 이런 명맥이 이어졌으며, 이곳은 근대적인 음식점의 발상지로 자리 잡게 되었다. 그중 ‘이문설농탕’은 가장 오래된 음식점으로 1900년대 초에 개업한 이래 지금까지도 설렁탕을 판매하며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1930년대 문을 연 청진옥은 종로의 땔감 시장을 찾아오는 나무꾼을 상대로 새벽마다 해장국을 팔았던 곳으로 유명했다.
일정강점기 대표 대중음식, 설렁탕
근대 음식점의 탄생과 번성이 설렁탕 때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설렁탕은 일제 강점기를 대표하는 대중적인 음식이었다. 일제 강점기 때는 설렁탕을 설농탕(雪濃湯)이라 하기도 했다. 살코기와 뼈에서 우러난 콜로이드 성분이 녹아 우윳빛을 띠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으로, 눈처럼 희고 맛이 진하다는 의미에서 썼던 말이다.
1920년대 말에는 경성에 설렁탕을 파는 식당들이 100여 곳에 이를 정도로 늘어났다. 이렇게 급속도로 설렁탕 전문점이 증가한 이유는 소고기, 국물과 밥을 좋아하는 한민족의 입맛이 크게 작용했다. 더구나 큰 무쇠솥에서 푹 끓여야 진한 국물이 나오므로 간편하게 식당에서 사 먹는 것이 수월하고 맛도 좋았다. 여기에 군용 통조림을 만든 후에 버린 소의 부산물을 사용했기에 가격 경쟁력이 높다는 장점도 있었다.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 표지에 실린 신선로. 한우와 한우 완자를 가득 넣은 신선로는 당시 요리점의 대표 음식이었다.(출처: 전통문화포털)
서울을 대표하는 음식인 설렁탕이 언제부터 식당에서 판매하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1900년대 이전부터 서울 종로 뒷골목에는 설렁탕을 파는 주막이 있었다고 한다. 한국 대중잡지의 시초로 꼽히는 <별건곤>에서는 설렁탕을 ‘고량진미를 가득 늘어놓고도 입맛이 없어서 젓가락으로 깨작거리는 친구도 설렁탕만은 괄시하지 못한다. 이만하면 서울의 명물이 될 수 있으며 조선의 명물이 될 수 있다’라고 평하기도 했다.
갈비+냉면, 현재까지 이어지는 환상의 조합
일제 강점기 갈비는 선술집의 안주로 인기를 끌다가 음식점의 정식 메뉴로 자리매김했다. 1920년대 선술집에서 술안주로 구워 팔던 갈비를 정식 메뉴로 판매하기 시작한 때는 1920년 중반 정도로 보인다. 이 시기에 갈비구이는 오늘날과는 달리 값싼 음식으로 취급됐다. 이는 설렁탕과 마찬가지로 갈비도 일본인들이 즐기지 않던 소의 부산물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주로 막걸리를 파는 선술집에서 술안주로 갈비를 구워서 판매했다.
1930년대에 접어들며 평양냉면집에서 갈비구이를 팔면서 냉면과 갈비의 환상적인 조합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조풍연이 쓴 <서울잡학사전>을 보면 당시 저녁 늦은 시간에 술집에서 나온 술꾼들이 냉면 한 그릇에 암소 갈비 두 대를 주문해 먹기를 즐겼다고 한다. 이러한 풍조는 오늘날까지 이어져 ‘선육후면(先肉後麵)’이란 말이 생겨날 정도로 갈비와 냉면은 환상의 조합을 이루고 있다.
갈비의 맛을 알게 된 이후 갈비를 구워 파는 집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났고 심지어 갈비를 먹다가 목숨을 잃는 웃지 못할 일까지 발생하기도 했다. 이러한 갈비에 대한 인기는 광복 후에 한국의 경제가 눈부시게 성장하면서 다시 한번 크게 확산됐다.
조선시대부터 국밥이나 술국 등을 많이 팔았던 피맛골은 근대 음식점의 발상지가 됐다. 세로로 된 좁은 골목이 피맛골이다.
한민족의 ‘소울푸드’ 설렁탕은 일제 강점기 때 대중적으로 큰 인기를 얻으며 근대 음식점의 탄생과 번성을 이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