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시대에는 농업생산력을 높이기 위해 대체 노동수단인 농우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출처: 국립중앙박물관, 김홍도 ‘논갈이’)
조선시대 농업 생산 기술은 소의 풍부한 힘을 전제로 발달했다. 귀한 노동수단이었 던 소의 도축을 금지하기 위해 조선의 왕들은 우금령을 내리고 위반자를 처벌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왕부터 양반, 일반 서민들까지 모두 소고기에 열광했다. 이번 호는 한우 육식 문화의 ‘황금기’ 조선시대로 돌아가 본다.
농업국가의 대체 불가한 절대적 존재
조선시대 문헌에 자주 등장하는 ‘농자천하지대본’이라는 말에서 엿볼 수 있듯이 조선은 농업이 국가의 근간이었다. 따라서 농업생산력을 높이기 위해 노동력 확보가 무엇보다 중요했지만, 당시에는 노동력이 크게 부족했던 탓에 대체 노동수단인 농우에 관심을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소 사육 두수는 농사에 충분할 정도로 많지 않았다. 세종은 “민가에 소가 있는 사람은 열 집에 한 집 정도이며, 소가 있는 집도 한 마리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고, 경상도 암행어사로 나갔던 조수익은 “도 내에 소가 귀하기 때문에 백성들이 땅을 갈지 못해 가끔은 사람이 쟁기를 끈다”고 했다.
이에 조선은 건국 초부터 소를 도축하지 못하도록 하는 우금정책을 실시했다. 1398년(태조 7년) 처음으로 우금령을 내린 후 역대 국왕들은 비록 횟수와 강도에 차이가 있었지만 지속해서 우금령을 반포했다. 이와 함께 우금령 위반자 처벌 규정도 마련했다. 처벌 내용을 보면 자기의 소를 도축한 자, 남의 소를 사서 도축한 자, 남의 소를 훔쳐 도축한 자 순으로 점점 형량이 무거워졌다. 특히 남의 소를 훔쳐 도축한 자는 ‘교형(絞刑)’에 처해지기도 했다. 그러나 우금정책이 실시되는 중에도 위로는 국왕부터 아래로는 일반 백성까지 모두 소고기에 집착했다.
▲ 1543년 편찬된 <대전후속록>에는 우금령 위반자에 대한 처벌 규정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소고기가 있으면 ‘후대’, 없으면 ‘박대’
일부 양반사대부는 소고기를 먹지 말아야 하는 고기로 인식했다. 그 이유는 자신의 생활신조나 가치관에 따라 다양했지만, 실제로 소고기를 먹지 않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양반사대부 대부분은 우금령에도 불구하고 열광적으로 소고기를 즐겼다. 그들은 소고기를 가장 맛있고 귀한 별미 음식 재료이자 보양식 재료로 인식하고, 음식의 맛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삼았다. 또한 접대에서 소고기의 유무에 따라 후대와 박대를 가늠하는 기준으로 삼았고, 나아가 접대자의 사람 됨됨이를 평가하는 기준으로 삼았다. 당시 소고기를 선물 받거나 대접받는 것은 상대방으로부터 인정받는다는 것을 나타내는 하나의 상징이었다.
조선 후기 들어서는 양반사대부 사이에서 화로에 숯불을 피우고 양념한 소고기를 구워 먹는 모임, ‘난로회’가 유행했다. 난로회에서 소고기를 구울 때 사용한 번철은 당시 군인들이 쓰던 벙거지 모양의 모자인 ‘전립’을 뒤집은 형태를 본떠 고기구이와 각종 채소를 함께 넣고 국을 끓일 수 있는 ‘전립투’, 곧 벙거짓골이었다. 이 벙거짓골에 조리해 먹었던 음식도 같은 이름으로 불렀던 것으로 보인다. 양반사대부들은 벙거짓골 외에도 우심적, 가리구이, 너비아니, 설하멱 등 소고기구이 요리를 즐겼다. 여기에 소고기의 다양한 부위를 이용해 조리한 음식인 열구자탕이나 육회 등을 즐겨 먹었다.
▲ 양반사대부들이 ‘난로회’에서 고기구이와 각종 채소를 함께 넣고 국을 끓이는 데 사용했던 ‘전립투’(출처: 천안박물관)
서민들의 주린 배를 달래주던 설렁탕
경제적인 여유가 없는 일반 서민들은 구이 등을 통해 소고기 본연의 맛을 즐기기보다는 더 값싼 내장 등의 부산물을 이용해 국이나 탕을 끓여 먹었다. 이에 조선 후기에는 소의 모든 부위를 국물로 만들어 먹는 국밥문화가 유행했다.
조선 후기에 소고기를 이용한 국(탕)을 재료에 따라 분류하면 내장으로 만든 국에는 양탕, 살코기와 내장을 함께 넣어 만든 국에는 고음, 잡탕, 육개장 등이 있었다. 또 뼈가 붙은 고기로 만든 국(탕)에는 족탕과 꼬리탕이, 살코기만을 넣고 끓인 국으로는 우갱, 즉 소고깃국이 있었다.
여러 종류의 국과 탕 중에서 일반 서민들이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어떤 국(탕)을 주로 먹었는지는 구체적으로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서민들의 넉넉하지 못한 호주머니 사정을 고려하면, 살코기가 주재료로 더 많이 들어가는 국(탕)은 자주 먹지 못했을 것으로 보인다. 꼬리탕도 소 꼬리가 소 한 마리에 한 개밖에 없다는 점을 고려하면 서민들이 섭취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뭐니 뭐니 해도 조선시대 때 가난하고 배고프던 일반 서민들이 가장 즐겨 먹었던 소고기로 만든 국은 설렁탕이었다. 당시에도 설렁탕은 소탈한 서민 음식의 상징이었다.
▲ 주머니 사정이 넉넉하지 못했던 일반 서민들은 소의 부산물을 이용해 국이나 탕을 끓여 먹었다.(출처: 국립중앙박물관, 김홍도 ‘주막’)